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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레나의 꿈의 구장/축구가 있는 풍경

시민구단 어느 무명선수의 아름다운 프로포즈

대전시티즌 숙소는 ‘대전시티즌’이라는 이름과 어울리지 않게 국곡리 어느 깊은 산골짜기에 있습니다. 핸드폰도 잘 안 터지는 그곳에 가기 위해선 택시 아저씨들에게 늘 웃돈을 더 줘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다시 대전 시내로 가기 위해선 콜택시를 불러야 하고요. 물론 그때마다 택시 아저씨들은 ‘거기까진 못가겠다“며 거부하기 일쑤죠 



 2007년 6월 9일. 그날 저는 인터뷰를 하기 위해 대전시티즌 숙소를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그만 이야기가 길어지고 말았죠. 질문이 꽤 많았거든요. 인터뷰가 끝난 뒤 숙소 밖으로 나갔을 때 저를 반긴 건 칠흑 같은 어둠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떡하겠어요. 그 어둠을 뚫고 집에 가야만 했죠. 114 안내전화를 통해 콜택시 전화번호를 알아낸 다음 열심히 통화를 시도했답니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역시나 “힘들겠는데요” 뿐이었습니다.


 계단 한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다시 통화 버튼을 눌렀습니다. 멀리서 계곡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더군요. 한쪽 풀숲에서는 개구리들의 합창이 계속 됐죠. 6월의 밤바람은 꽤나 시원했답니다. 3층에서는 웬 선수가 열심히 SG워너비의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었고요. 집에 갈 차만 있었다면 무척이나 낭만적으로 다가왔을 순간이었을 거예요. 아마. 


 ‘내가 과연 오늘 집에 갈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한 선수가 다가왔습니다. “기자님, 제가 (장)현규 형한테 차 키 빌려올게요. 유성 터미널까지 데려다드리면 되죠? 잠깐만 기다리세요.” 골키퍼 유재훈 선수였습니다. “아, 안 그러셔도 되는데. 괜찮아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택시 부르기가 너무 힘들다는 것을 이미 깨달아버린 저는 “아, 네. 고맙습니다”라고 말한 뒤 그를 기다렸답니다. ^^;


 잠시 후 유재훈 선수가 내려왔습니다. 차 주인인 장현규 선수에게 마음속으로나마 감사인사를 드린 뒤 차에 올라탔습니다. 우리의 대화는 그렇게 곧 시작됐죠.


“요즘 참 좋으시겠어요.” “그러게요. 경기장에서 뛸 때 선수는 가장 행복한 법이죠.” “데뷔전 기억나요. 그날 비가 참 많이 내렸는데…” “아… 그때요…”


 5월 16일 저녁 8시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FC서울과의 경기에서 유재훈 선수는 K-리그 데뷔전을 치렀습니다. 그날은 경기 시작 전부터 비가 참 많이도 내렸죠. 킥 오프 휘슬이 울렸을 때도 비는 좀처럼 멈출 기색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때문에 유재훈 선수는 종종 공을 놓치며 불안한 모습을 보였죠. 가뜩이나 데뷔전이라 잔뜩 긴장까지 했는데 말이에요.
 
 결국 그는 전반 31분 김은중 선수에게 선제골을 허용하고 말았습니다. 그 골은 결국 그날의 결승골이 되었고 대전시티즌은 0-1로 패하고 말았죠. 무척 속상했겠지만 그에게서 프로 입단 1년 6개월 만에 K-리그 데뷔전을 치룬 소감을 듣고 싶었습니다. 오랜 기다림 끝에 맺은 결실은 승패에 상관없이 빛날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그러나 저는 그의 곁에 다가갔다 곧 한 걸음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눈물로 범벅된 그의 얼굴을 봤기 때문이죠.


 “제가 그 골만 막았어도 컵 대회 플레이오프 진출을 꿈꿀 수 있었을 거예요. 제 실수 때문에 이젠 희망조차 가질 수 없게 됐어요.”


 그렇습니다. 그의 말처럼 대전시티즌은 FC서울에게 패하면서 컵 대회 플레이오프 탈락을 확정 짓고 말았지요. 그렇지만 어떻게 그것이 전적으로 골키퍼인 그만의 책임일까요? 그런데도 그는 자신 때문이라며 눈물을 펑펑 쏟았습니다.


 “데뷔전 때 흘린 눈물이 참 인상 깊었다”는 이야기를 꺼내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날 하늘에서는 비가 끝없이 내렸어요. 마치 제 마음을 위로해주는 듯 했어요. 그날 내린 비와 그 빗속에서 흘린 눈물을 기억해요. 물론 패배가 부끄러워 눈물 흘린 건 아니에요. 비록 제 데뷔전은 패배로 끝났지만 이제 시작이잖아요. 그래서 절망하지도 또 낙담하지도 않아요. 그동안 사람들은 저라는 선수가 대전시티즌에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잖아요. 그렇지만 그날 그 경기 덕분에 저는 제 존재를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었어요. 그것만으로도 만족하고 감사해요. 앞으로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제 이름을 알리려고요. 그러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노력해야겠죠.”


 하지만 그날 그보다 더 인상 깊었던 것은 따로 있었습니다. 바로 “7년 동안 만난 여자친구의 기도 덕분에 여기까지 온 거예요. 그녀에게 감사해요”라던 데뷔전 소감이었죠.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 만났어요. 신앙심이 참 깊어요. 힘들 때마다 늘 저를 위해 기도해주거든요. 그 기도 힘으로 제가 버틴 것 같아요. 고맙죠. 어느새 만난 지도 7년 째에요. 그러다보니 결혼까지 생각하게 됐어요. 그런데 막상 고민이 되더라고요. 결혼을 하기 위해선 돈이 필요한데 제가 프로에 입단한지 이제 2년 차라 아직 돈을 많이 모으지 못했거든요. 참 고민이었죠. 돈을 좀 더 모은 뒤에 할까도 생각해봤어요. 그런데 (최)은성이 형이 그러더라고요. 결혼하는데 돈이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건 아니라고요. 살면서 차근차근 모으면 되는 거니까 좋은 사람 놓치지 말고 빨리 결혼하라고 충고해주셨어요. 형 이야기 들으니까 답이 보이더라고요. 함께 살면 경제적으로 더 힘들지도 몰라요. 그래도 서로 더 아껴 살면 되지 않겠어요? 저 챙겨준다고 그동안 울산에서 고생 많이 했는데 결혼하면 제가 옆에서 챙겨주면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로 만들어주고 싶어요. 날짜도 정했어요. 12월 1일에 울산에서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어요. 그때 시간되면 꼭 오세요. 청첩장 보내드릴게요(웃음),”


 그리고 어제(2일) 8시, 유재훈 선수는 대전월드컵경기장을 찾은 18,184명의 관중 앞에서 자신이 사랑하는 그녀, 배정현 씨에게 사랑을 고백했습니다.  


 "당신의 미소에 힘을 얻고 당신의 말 한마디에 용기가 생기고 당신의 환한 얼굴에서 희망을 봅니다. 당신과 함께 가는 길이라면 거친 가시나무 길도 험난한 바위산과 마주한다 해도 두려움도 머뭇거림도 거칠 것도 없습니다. 오직 당신만이 나에게는 희망과 용기를 주는 사람이니까요. 언제나 나에게 변함없는 사랑을 주는 늘 나에게 변함없는 행복을 주는 항상 내 삶의 활력소가 되는 이 사람을 사랑합니다. 저와 평생을 함께 해 주십시오." 그렇게 말하며 그는 무릎을 꿇은 채 청혼했지요.


 어제도 경기장에는 추적추적 비가 내렸답니다. 데뷔전을 치르던 그날처럼 말이죠. 그가 했던 말이 생각납니다. 데뷔전 당시 맞은 비를 잊을 수 없다던 그 말이요. 그러나 어제 내린 비는 그보다 더 특별히, 또 깊이 기억될 것이 분명합니다. 비록 경기엔 뛰지 못했지만 평생의 동반자가 될 그녀에게 다시 한 번 진실된 사랑을 고백했으니까요. 그리고 그 순간, 퍼플아레나를 찾은 수많은 관중들의 진심어린 축하 인사를 받을 수 있었으니까요. 무엇보다 그 많은 사람들이 그 아름다운 순간을 기억해줄 증인이 됐으니까요.


 그날 대전시티즌의 승리를 기원한 사람들은 아쉽게 1-2 패배를 지켜보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그들 기억 속에는 아쉬운 역전패만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정현아, 7년이란 시간동안 변함없이 내 곁을 지켜줘서 너무 고맙다. 가까이에서 지켜주지 못해서 항상 맘에 걸리고 힘들었는데 이제부터라도 옆에 두고 널 지켜 주고 싶어. 세상 모든 어려운 일 내가 다 막아주는 너만의 골키퍼가 되서 말이야. 사랑해!! 많이!!"


 냉정한 승부의 세계가 펼쳐지는 축구장에도 낭만은 있었네요. 비록 가진 것은 부족하지만 마음만은 부자인,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두 사람의 앞날을 축복합니다. 지금처럼 한결같은 마음으로 오래 오래 사랑하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