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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레나의 꿈의 구장/Footballers

수원 주장 송종국이 말하는 '캡틴의 조건'


1912년 4월10일 ‘하느님도 침몰시킬 수 없는 배’라는 찬사와 함께 출항했던 타이타닉호는, 4월14일 밤 11시 빙산과 충돌한 후 수 시간 만에 심해로 가라앉고 만다. 당시의 비극을 필름으로 재현한 영화 <타이타닉> 말미에는 마지막 순간까지 키를 놓지 않았던 존 스미스 선장의 모습이 담겨 있다. 소임 앞에 숨까지 내놓으며 끝까지 책임을 다한 그 모습은, 나서 이끄는 사람의 의미를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주었다.

선장의 영어식 표현이 주장을 뜻하는 단어 ‘캡틴(Captain)’과 같다는 사실은 아마도, 서 있는 자리는 다를지라도 같은 무게의 책임감을 어깨에 올려놓은 사람이기에 한 단어로 부르는 게 아닌가 싶다.


경기장 밖에서도 쉽게 주장 완장을 벗어 던지지 못했던, 지난 1년 간 오로지 푸른 군단의 재건만을 위해 뛰었던 ‘캡틴’ 송종국을 만났다. 주장 송종국이 펼쳐 보인 주장론은, 수은주는 영하를 가리키고 있었지만 뜨겁고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장시간을 오갔다.

첫 직선제 주장
“프로 데뷔 이후 정규리그에선 단 한 번도 우승컵을 들지 못했어요. 그 때문에 긴장도 심했고 걱정도 많았죠. 특히나, 결승전을 앞두고는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오죽했으면 경기 전날 수면제를 먹고 간신히 잠들었을까요. 지난 시즌 주장으로 있다 보니 일 년 내내 나 하나가 아닌 팀 전체를 생각하며 지냈어요. 그런 가운데 결승전이 다가오면서부턴 다른 선수들 컨디션까지 살펴야했고요. 신경 쓸게 너무 많았던 탓에 좀처럼 긴장을 풀 수 없었고, 아무래도 그 때문에 잠이 달아난 것 같네요.”

송종국은 원하던 열매를 얻었기에 지난날의 고생쯤은 아무 것도 아니라며 웃었다. 하나 청자의 입장에서 따라 웃을 수 없었던 까닭은, 그 말이 곧 주장으로 보낸 시간이 결코 쉽지 않았음을 뜻하기 때문이었다. 대사를 앞두고 홀몸 건사하기도 힘들었을 텐데, 와중에도 서른 명이 넘는 선수들을 일일이 챙겨야했으니. 깊게 들어가지 않아도 어려운 일이었음을 분명 알 수 있었다.

“시즌을 앞두고 ‘주장 선거’를 가졌어요. 저를 비롯해 선수 몇 명이 동료 선수들의 추천을 받아 후보로 나왔고 선수단 전체가 투표에 참여했죠. 지금에 와서 말씀드리지만, 마음 한편으론 안됐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있었어요. 그동안 옆에서 지켜본 수원삼성의 주장이란 자리는 결코 쉽지 않은 자리였거든요. 그런데 투표 결과 꽤 많은 후배들이 저를 지지했더군요.”

수원 역사상 최초의 직선제 주장이었다. 그만큼 믿고 따르는 선수들이 많았다는 방증이니 무엇보다 영광스런 마음이 컸을 듯했다. 그러나 송종국은, 앞으로 건널 가시밭길 생각에 기쁨보단 고민이 우선이었다고 고백했다.

“강하게 이끌어갈까, 아니면 부드럽게 품고 나갈까. 고민이 많았어요. 한 시즌은 하루 이틀이 아닌 일 년이라는 긴 시간이잖아요. 그 속에서 초지일관을 유지해야하는데, 그러려면 아무래도 평소 제 성격대로 하는 게 가장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음속으로 후배들의 입장에서 손을 잡자고 다짐했는데, 그 부분은 지금도 잘한 선택이라고 생각해요. 어려운 선배가 아닌 우리 형 같은 느낌으로 다가갔기에 후배들도 힘든 부분에 대해 예전보단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거든요. 마음을 터놓을 수 있었던 게 결국엔 팀 전력에도 좋은 영향을 끼쳤다고 봅니다.”

보이지 않던 노력의 노력들
처음 수원의 주장으로 불리게 됐을 때, 송종국이 가장 중점을 둔 것이 바로 대화의 미학이다. 그의 말마따나, 확실히 지난 1년은 입보다 귀를 더 많이 열었던 시간이었다.

“저희 팀에는 스타 플레이어들이 많이 있는데요, 어린 선수들에게는 늘 어렵고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죠. 그 때문인지 복도에서 만나게 돼도 간단히 인사만 하고 지나칠 뿐이었어요. 팀에 대한 애착도, 선수들 간의 우정도 점점 사라지는 것만 같아 안타까웠어요. 제가 주장을 맡으면서 적어도 그 부분만은 다 같이 노력해서 깨고 싶었어요. 그래야 비로소 ‘한 팀’이라고 말할 수 있으니까요.”

대화의 물꼬를 트기 위해 송종국이 정한 방침은 ‘고충은 듣되 잘잘못을 가리진 말자’였다고 한다.

“K리그에서도 자세히 살펴보면 알게 모르게 ‘파’가 갈려 내부적으로 분열된 팀들이 몇몇 있어요. 문제는 그게 경기력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죠. 골이 깊어지면 자기가 마음에 들지 않는 선수는 좋은 위치에 있어도 볼을 안주게 되는 일들도 생기거든요. 결국엔 팀이 실패하는 결정적 원인이 되고 말죠. 작년 수원엔 그런 게 전혀 없었어요. 하나가 됐다는 표현이 딱 들어맞을 정도로 합심했어요. 지난해 컵 대회와 정규리그 후반기 때 2군 선수들이 올라와 좋은 활약을 펼쳤잖아요. 전적으로 대화를 통해 서로간의 믿음을 확인할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줄곧 2군에서 뛰다 1군에 갓 올라온 선수들은 무거운 분위기에 눌려, 익숙하지 않아서 등 이런저런 이유로 자기 실력을 온전히 발휘하지 못하기 십상이거든요. 그런데도 그 선수들이 제 몫 이상을 해줄 수 있었던 건, 물론 스스로의 노력도 컸겠지만 역시나 대화의 힘도 중요하게 작용했다고 봅니다.”

주장으로서, 송종국이 쏟은 노력들은 그렇게 겹겹이 쌓였는데 여기서 한 가지 칭찬하고 싶은 부분이 바로 솔선수범형 리더십이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리더십이 가장 돋보였던 순간은 다름 아닌 챔피언결정전 현장에서였다. 중원에서 끊임없이 공격과 수비 진행 방향을 리딩하던 ‘키맨’ 송종국의 모습은 1·2차전 내내 단연 눈에 띄었다. 특히 송종국의 진가는 그의 플레이가 단순히 지시를 내리는데서만 그치지 않았다는 사실에 있었다. 그는 기성용과 이청용의 발끝에서 시작되던 서울의 공세를 막아내는 1차 저지선으로 맹활약했고, 선수들의 구심점이자 마지막 순간까지 ‘숨은 살림꾼’ 역할을 제대로 해냈다는 호평을 이끌어냈다.

“주장이기 이전에 선배로서 책임감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물론 힘들었던 것도 사실이에요. 제 플레이하기도 바쁜데 다른 선수들 것까지 봐주면서 커버해야했으니까요. 하지만 제가 한발 더 뛰면 동료들이 편하잖아요. 체력이 받쳐주는 한 더 많이 움직이며 팀에 보탬이 되고 싶었어요. 또 선수들에게도 믿음을 주고 싶었고요.”

후배들 역시 그 마음을 알아챈 것일까. 지난해 12월 K리그 시상식장에서 만난 수원 선수들은 “(이)운재 형 뿐 아니라 (송)종국이 형에게도 MVP를 주고 싶다”며 입을 모아 말했다. 송종국에게 당시 이야기를 전해주자 그는 얼굴에 잔잔한 미소를 띠우며 말했다. “이보다 더 행복한 주장이 또 있을까요”라고.

주장이 생각하는 주장은
“2002월드컵 당시 제 눈에는 선배들이 참으로 대단한 선수로 비춰졌어요. 저 뿐 아니라 어린 선수들 대부분의 생각이 그랬습니다. 선배들이 없으면 우리가 어떻게 경기를 풀어가겠냐고 말할 정도였으니까요. 특히나 주장이던 홍명보 선배님께 많이들 의지하며 지냈어요. 선배님께서 그만큼 큰 버팀목이 되어주신 거죠. 그렇지만 지금은....... 글쎄요. 요즘 선수들에게 주장이란 존재가 더 이상 의지의 대상은 아닌 것 같습니다.”

시대가 바꿨고 선수들의 사고방식 역시 변했으니 주장상(主將像) 또한 달라져야 한다는 게 송종국의 지론이다.

“많은 사람들이 주장이 갖춰야할 덕목으론 카리스마를 꼽잖아요. 아무래도 예전부터 주장 자리에 있던 선배들이 갖고 있던 이미지가 그랬으니까요. 그렇지만 이제는 어머니 같은 포용력을 더 요구하는 것 같아요. 잘못 나가고 있을 때는 엄하게 꾸짖되 평소에는 어머니처럼 ‘네 마음 다 안다’며 품을 줄 아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주장이라고 목소리만 높이는 시대는 이제 지나갔습니다.”

인터뷰가 끝날 무렵, 송종국은 후배들과 약속한 훈련시간에 늦었다며 서둘러 채비를 갖췄다. 그러나 선수단을 위한 마지막 인사말을 잊지 않고 전했다. 마지막까지 주장은, 역시 주장다웠다.



“수원의 역사에서 가장 행복했던 주장이 아니었나 싶어요. 70점짜리 주장을 믿고 따라온 선수들에게 고마웠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이제는 주장의 위치에서 한 계단 내려오지만 지금처럼, 앞으로도 후배들이 필드 위에서 더 많은 능력을 펼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선배로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