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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레나의 꿈의 구장/축구가 있는 풍경

공부하는 축구선수 육성, 가능할까?

이제 막 수염이 거뭇거뭇 돋기 시작한 열여섯 남짓 소년들은 잔디 위에 엎드린 채 엉엉 울었다. 2007년 8월21일 수원종합운동장. U-17월드컵 조별리그 2차전에서 한국은 코스타리카에 0-2로 패했다. 페루전(0-1)에 이은 2연패로 16강 진출은 사실상 물거품이 됐다. 이날의 실패가 선수들에게는 스스로 깨뜨려야할 껍질로 남았고, 유소년축구 행정 관계자들에게는 ‘반드시’ 풀어야 할 숙제를 안겼다. 그렇다면 이와 관련, 중등축구연맹은 과연 어떤 비전을 제시할까. 김석한 중등축구연맹 회장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새로운 출발, 새로운 시도
2004년 대한축구협회는 중고축구연맹을 분리하기로 결정했다. 중‧고교 축구팀의 증가 및 리그제 도입으로 연령별 특성에 맞는 운영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이듬해 2월 김석한 회장(인성하이텍 CEO)은 만장일치로 초대 중등축구연맹 회장에 선임됐다. 중등축구연맹(이하 중등연맹)의 출범은 곧 중등축구의 질적인 발전으로 이어졌다. 그 중심엔 김 석한 회장이 있었다. 김 회장은 우선 중등연맹이 주관하는 춘‧추계연맹전 운영방식을 대폭 수정했다.

“매 대회마다 약 140여 개 팀이 출전합니다. 그렇지만 트로피는 우승팀과 준우승팀만 들 수 있습니다. 어린 선수들에겐 너무 가혹한 일입니다. 대회를 양육강식의 장이 아닌 흥겨운 축제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룹을 5개로 나눈 뒤 각 그룹별로 우승팀을 가리는 방식을 도입했습니다. 그렇게 하니 우승팀만 자그마치 다섯이나 나오더군요. 개인시상 영역도 크게 늘렸습니다. 미드필더상, 수비상, GK상을 신설했습니다. 대회 참가를 통해 선수들이 꿈과 희망을 얻게 됐으니 이보다 더 좋은 게 어디 있겠습니까? 결승전을 월드컵경기장에서 치르는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그간 월드컵경기장은 프로와 대표 선수들만 뛸 수 있다고 인식됐습니다. 어린 선수들이 그런 큰 무대를 밟는 기회를 잡는다는 것은 꿈만 같은 일이지요. 목표의식이 강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현재 중등연맹이 유치할 수 있는 대회는 춘‧추계연맹전이 전부다. 김 회장은 이 부분이 가장 안타깝다고 말했다.

“매년 열리는 전국대회의 절반 이상을 대한축구협회가 주관합니다. 반면 초등연맹과 대학연맹은 모든 대회를 자체적으로 유치합니다. 사실 중등연맹도 대회를 유치, 주관할 수 있는 시스템과 제반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관을 안 시키는지 모르겠습니다. 협회가 중등연맹을 믿고 일을 맡기면 좋겠습니다.”

이같은 요구의 우선적 이유는 한국축구의 자양분을 만들기 위함이다. 중등연맹이 ‘1학년 축구대회’를 신설한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중학교 1학년 선수 대다수는 심부름만 하다 입학 첫해를 보내기 일쑤입니다. 일명 ‘주전자’로 불리는 아이들에게도 뛸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었습니다. ‘1학년 축구대회’는 그리하여 탄생된 거죠. 춘계연맹전의 경우 정규규격보다 작은 경기장에서 7대7로 경기를 치르게 합니다. 갓 초등학교를 졸업한 선수들이라 정규규격 운동장은 다소 벅찰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좁은 공간에서 공을 빨리 패스할 수 있는 습관을 길러주기 위해서죠.” 그렇다면 이 대회가 남긴 성과는? “1학년 선수들이 자신감을 많이 얻었습니다. 그리고 이는 경기력 향상으로 이어졌습니다.”

청출어람 청어람(靑出於藍 靑於藍)이 되길 위하여
푸른빛은 쪽에서 만들어지지만 쪽보다 더 푸르다. 하나 쪽이 없다면 푸른빛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학원축구에서도 마찬가지다. 무릇 좋은 선수란 좋은 지도자를 통해 길러지는 법이다. 김 회장이 해마다 지도자들을 네덜란드로 보내 선진축구를 접하게 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네덜란드 축구협회에서 주관하는 연수 프로그램입니다. 선발된 지도자들은 현지의 각 클럽, 학교 등을 돌며 유소년 코칭론을 배웁니다. 벌써 4년째 진행 중입니다. 반응이 좋아 금년에는 별도로 네덜란드 현지 유소년 강사를 초청, 국내 연수 프로그램도 마련할 계획입니다.” 김 회장은 ‘교육의 힘’을 믿는 사람이다. 현장에서 지도자들을 만날 때도 늘 이같은 덕목을 강조한다. “중등연맹은 ‘공부하는 축구선수’라는 슬로건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를 선수들에게만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일선 지도자들이 솔선수범해야겠죠. 어린 학생들은 스승의 움직임을 따라하는 법이니까요. 노력없이는 살아남기 어려운 세상입니다. 연구하는 지도자가 되십시오.”

그 다음은 바로 ‘정직’이다. “정직은 인생의 기본과도 같습니다. 또한 인간됨의 척도이기도 합니다. 정직하지 못한 지도자에겐 경종을 두드려야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중등연맹이 지향하는 지도자상입니다.”

선수를 위한 길
인터뷰 도중 ‘공부하는 축구선수’라는 이야기가 언급된 김에 짚어 보기로 했다. 사실 선수들은 ‘학생선수’이기 전에 ‘선수학생’이다. 그러나 대부분 축구와 공부가 주객전도된 상태에서 학창시절을 보낸다. 결과적으로 이는 운동 중 조기 탈락한, 또는 은퇴 후 제2의 인생을 시작하려는 선수들에게 고통을 줬다. 물론 그간 축구협회에서도 이 문제를 충분히 통감하고 있었다. 협회는 클럽시스템 도입 및 주말리그제 정착으로 해결하려 했지만 여전히 ‘산 넘어 산'이다.

“모든 선수들이 축구로 성공할 수는 없습니다. 축구를 그만둔 선수들은 과연 무엇을 하며 살아가야할까요?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 선수들은 좌절하거나 스스로를 낙오자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 이유에서라도 교육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선수들은 일반학생들과 학업성취도가 다르기 때문에 별도의 교육을 받아야합니다. 해답은 결국 ‘맞춤형 교육’에 있습니다. 물론 각 학교의 노력이 있어야겠죠.”

김 회장은 선수보호를 위해 ‘칼’을 뽑는 일도 망설이지 않는다. 중등연맹은 올해 초 ‘고의적으로 유급한 선수는 대회에 참가할 수 없다’는 규정을 발표했다. 이는 2008춘계연맹전부터 적용된다.

“협회에서 먼저 방향을 제시했지만 저 역시 예전부터 공감하고 있던 문제였습니다. 중등연맹은 U-15연맹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종종 16세 선수가 시합에 뛰는 일이 발생합니다. 1년 유급한 선수들이 스쿼드의 절반을 차지한 팀을 실제로 본 적도 있습니다. 알다시피 성장기 선수들은 나이에 따라 기량차가 확연히 드러납니다. 이를 몇몇 지도자들이 악용하는 것이죠. 결국 성적지상주의 아래 선수만 피해자가 됩니다. 그래선 안 되죠. 제도를 손봤으니 앞으론 일부러 유급하는 선수들이 안 나올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중등연맹을 총괄하는 수장으로 선수 및 지도자들을 향한 당부의 말을 청했다.

“허허. 선수들에게 당부할 말이 뭐 있겠습니까. 어린 선수들은 도화지와 같습니다. 도화지에 첫 스케치를 어떻게 하느냐, 어떤 색을 입히느냐에 따라 그림은 달라지는 법입니다. 대신 지도자들에게 한마디 올리겠습니다. 선수들은 여러분들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따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늘 관심을 갖고 애정 어린 지도를 부탁합니다. 중등연맹에서는 선수별 맞춤지도가 가능한 환경을 만들도록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