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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레나의 꿈의 구장/Footballers

아픈 가정사 딛고 우뚝 선 GK 정성룡

코트니부아르와의 친선경기가 열린 수원월드컵경기장. 전반 40분 정성룡이 찬 롱 킥이 상대 수비수와 골키퍼 사이에 떨어져 한 차례 튀더니 그대로 골키퍼를 머리 위를 지나 골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자그마치 85m나 되는 행운의 선제골이자 대표팀 사상 첫 GK골이었다. 동료 선수들이 달려가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축하해주는데도 정성룡은 겸연쩍은 웃음만 지을 뿐이었다. 그 모습이 지극지 정성룡스러워 지켜보던 나도 웃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아는 정성룡은 참 무던한 사람이다. 쉬이 기뻐하지도, 또 슬퍼하지도 않는다. 감정의 기복 따윈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경기 중에 수비수들을 향해 시종일관 지시를 내리지만 보통의 골키퍼들이 보여주는, ‘화’나 ‘성질을 좀체 제어하지 못하는 그런 모습은 아니다. 끊임없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 치지만 그의 얼굴에선 감정을 읽을 수 없다. 그만큼 포커 페이스다. 정성룡은.

언젠가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고 생각하다 굴곡 많은 삶에 이미 길들여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라는 결론에 도달한 적이 있었다. 아마 그도 알 것이다. 살아온 날들 가운데 쉬운 길이란 결코 없었다는 사실 말이다.

“고등학교 마치고 포항에 왔을 때만해도 2군에서 게임 뛰는 것조차 쉽지 않았어요. (김)병지 형이랑 (조)준호 형도 있었고, 저까지 합해 골키퍼가 5명이나 있었거든요. 전 그저 형들 게임하는 거 보는 것만으로도 배우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사실 그가 인내할 수 있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제가 원래는 스위퍼였는데 중2 때부터 골키퍼로 뛰었거든요. 그때가 마침 1998프랑스월드컵 기간이었는데, 네덜란드전에서 보여줬던 (김)병지 형 모습에 반했어요. 우리나라가 5-0으로 졌지만 형의 움직임이 참 인상적이었어요. 그때부터 좋아하게 됐어요. 그 후 제주도에서 고등학교 다닐 때 제주도에서 잉글랜드와의 친선경기가 열렸어요. 그때 볼보이한다고 골키퍼 뒤에 있었는데 그 골키퍼가 병지 형이었어요. 평소 존경하던 선수가 바로 제 옆에서 뛰고 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참 묘하더라고요. 나도 언젠가는 저렇게 되겠다고 다짐했죠. 열심히 해서 꼭 형처럼 국가대표 골키퍼가 되겠다고 제 자신과 약속했어요. 처음 포항에 왔을 때, 형이랑 같은 팀에서 훈련하는 것만으로도 기뻤어요. 그게 더 운동에만 전념하게 된 계기가 됐고요.”

그리고 포항에 입단한 지 채 1년도 되지 않았을 때, 2004아테네올림픽대표팀 예비멤버로 발탁됐다는 기쁜 소식이 전해졌다. 그러나 신은 가혹히도 그에게 잠시 쉬라 말하였다.

“소집 첫날이었어요. 연습 도중 다이빙까지는 좋았는데요. 그때 바닥에 깔린 잔디가 안 밀리는 잔디였던 거예요. 그 바람에 접질렸죠. 결국 어깨탈골로 수술까지 했고요. 다시 운동하기까지 4달이라는 시간이 걸렸어요. 정말 많이 속상했죠.”

“혼자서 눈물을 삼키진 않았나요? 그랬을 것만 같아요”라고 묻자 잠시 침묵하던 정성룡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원래는 많았어요. 음… 많았는데… 아버지 돌아가시던 날, 그날 다 운 것 같아요. 그래서 이젠 눈물이 안나요. 중학교 3학년 때 서귀포고등학교에서 스카웃 제의가 왔어요. 저 혼자 제주도로 갔어요. 부모님은 분당에 계셨고요. 그런데 제주도 간지 얼마 안돼서, 그러니까 막 고등학교 입학했을 때였어요. 어느 날 갑자기 선생님께서 저희 집에 같이 가자고 하셨어요. 무슨 영문인지 모른 채 따라 갔죠. 마음 단단히 먹으라고 하시더니 저를 장례식장으로 데려가시더라고요. 음… 원래 몸이 안 좋으셨는데… 갑작스럽게… 그렇게 떠나셨어요. 그날 병원 뒷길에서 엉엉 울었어요. 한참 울다 이제 내가 가장이니까 강해져야겠다. 성공해야겠다. 그렇게 다짐했어요. 그래서 더 열심히 했던 것 같아요. 제가 프로 갈 때만해도 계약금이라는 게 있었거든요. 계약금 받은 걸로 어머니께 집도 사드리고, 빚도 갚았어요. 음… 그렇지만 그걸로 효도했다 생각하진 않아요. 지금도 어머니를 생각하면 항상 죄송한 마음뿐이거든요. 늘 제 뒷바라지만 하셨어요. 그런데도 전 항상 제 생각만 했고요. 용돈 달라고 떼도 많이 쓰고. 그렇지만 저희 어머니는 참 강한 분이세요. 모든 어머니들이 다 그렇겠지만요.”

어머니와 축구만 생각했다. 그라운드에 우뚝설 날만 기다리며 기도했다. 그리고 2007년 5월22일 경남전, 그의 오랜 기도는 끝났다, 정성룡은 프로 입단 3년 만에 무실점이라는 깔끔한 기록으로 성공적인 데뷔전을 치렀다.

“항상 준비는 하고 있었어요. 기회는 오니까. 그런데 자주 오지 않는 그 기회를 놓치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매일 준비하며 기다렸어요. 기분이요? 그냥 덤덤했어요. 아직 더 많이 경험을 쌓아야 하잖아요. 좋아하기엔 이르다고 생각했어요.”

반가운 소식은 연이어 배달됐다. 그해 여름 정성룡은 베어백 호 1기에 발탁됐고, 도하 아시안게임 최종명단에도 이름을 올렸다. 그리고 이제는 국가대표팀과 올림픽대표팀을 오가며 두집 살림 중이다. 그렇게 어느새 대표팀에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존재로 거듭난 것이다.

“열심히 했어요. 경기 내용도 좋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언제까지나 이 경기만 생각할 순 없잖아요. 이제 또 다음을 준비해야하죠. 앞으로도 많은 날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뭔가 대단한 멘트를 기다렸지만 역시나 정성룡은 담담히 다음을 준비하겠다고 말한다. 참 여전하고 늘 변함없다. 그런 사람이 대한민국 골문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이, 나는 참으로 든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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