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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레나의 꿈의 구장/축구가 있는 풍경

울지말아요, 대전시티즌

대전 선수들은 눈물이 참 많습니다.


지난 해 8월 1일 수원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2006 하나은행 FA컵 축구선수권대회 16강전이 생각납니다. 당시 대전은 수원을 만났습니다. 모두가 대전의 별이 될 것이라 믿었던 이관우 선수를 여름 이적 시장에서 영입한 수원은 초반부터 이관우를 축으로 세운 뒤 거세게 대전을 밀어붙였습니다. 그러나 대전은 굳건히 버텼지요. 그리고 마침내 후반 36분 공오균 선수의 시원한 헤딩골에 힘입어 1-0으로 달아났습니다. 이렇게 대전의 승리로 끝나는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수원 역시 이대로 무너질 팀은 아니었나봅니다. 곧 이어 이싸빅 선수가 동점골을 성공시키며 1-1 상황까지 만들어 놓습니다. 결국 경기는 승부차기로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나저나 눈물 이야기를 하던 중 왜 FA컵 16강전 이야기를 하냐고요? 그날 대전은 두명의 키커가 실축하는 바람에 2-4로 지고 말았습니다. 토너먼트로 이뤄지는 FA컵 특성 상 대전 선수들은 고배를 마실 수밖에 없었죠. 제가 눈물 이야기를 꺼낸 이유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그날 PK를 실축한 뒤 장현규 선수가 흘렸던 그 눈물이 생각나서이기 때문입니다. 자신 때문에 진 거라며, 너무 미안하다며 눈물을 펑펑 쏟던 장현규 선수. 동료들이 괜찮다며 어깨를 두드렸지만 장현규 선수는 오히려 그게 더 미안했던지 하염없이 눈물을 쏟으며 채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그로부터 약 두 달 뒤인 10월 22일 후기리그 대구와의 홈경기가 열렸던 날도 생각납니다. 비가 참 많이도 내리던 날이었습니다. 그 비를 다 맞으면서 응원하고 있는 양 팀 서포터즈를 바라보며 대단하다 생각하고 있을 때였죠. 대구 선수의 반칙으로 대전에게 PK가 주어졌습니다. 키커는 정성훈 선수. 가볍게 성공했지만 사전에 골키퍼를 속이는 손동작을 했다는 이유로 무효 처리가 됐습니다. 다시 정성훈 선수 앞에 놓인 공. 그러나 그 공은 무심히도 크로스바 위를 올라갔습니다. 결국 대전은 오장은 선수의 선취골 때문에 1-0으로 지고 맙니다. 그날, 정성훈 선수는 잿빛으로 물든 하늘을 바라보며 오래도록 눈물을 흘렸습니다. 빗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정도로 그의 얼굴은 서럽게 젖어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서 데닐손 선수는 정성훈 선수를 꼭 안아주고 있었지요. 때론 백 마디 위로보다 말 없는 포옹이 더 큰 위로가 되는 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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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데닐손 선수의 눈물도 생각나는군요. 지난 해 9월 16일 전북와의 홈경기가 열렸던 날입니다. 김형범 선수의 크로스를 받은 보띠 선수가 골에어리어 정면에서 터뜨린 결승골로 대전이 1-0으로 패한 날이기도 합니다. 종료 1분 전까지 대전 선수들은 계속해서 전북 골문을 몰아붙였습니다. 너무 입술을 꽉 깨물고 뛰어서 저러다 피라도 나는 건 아닌지, 하는 걱정마저 들 정도로 대전 선수들은 정말 절박하게 싸웠습니다. 그렇지만 골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죠. 지금도 저는 대전 선수들의 골 결정력 문제라기보단 전북 수문장 권순태 선수가 너무 잘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해 전북이 AFC챔피언스리그 우승컵을 들기까지 권순태 선수가 보여줬던 신들린 선방은 그야말로 야신 같았으니까요. 그날도 그랬고요. 로스타임이 3분 주어졌던가요? 후반 47분 보띠 선수가 정인환 선수와 교체하기 위해 나갑니다. 그런데 천천히 걸어나가더군요. 누가 봐도 명백한 시간지연 행위였습니다. 보다 못한 강정훈 선수가 달려가 보띠 선수의 어깨를 감싼 뒤 뛰어갑니다. 결국 보띠 선수도 같이 뛸 수밖에 없었죠. 강정훈 선수의 뒷모습에서 저는 다시 한 번 승리를 향한 대전 선수들의 염원과 절박함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곧 이어 들려오는 심판의 종료휘슬. 허탈한 모습으로 앉아있던 정성훈 선수가 눈에 띄었습니다. 다시 경기장 전체로 시선을 돌려봤습니다. 엎드린 채 꼼짝도 않은 한 선수가 보이더군요. 누굴까요? 네. 데닐손 선수였습니다. 한참동안 웅그린 채 머리를 감싸쥐고 있던 그는 곧 다시 일어났습니다. 괜히 걱정스러운 마음에 데닐손 선수 쪽으로 다가갔습니다. 역시, 그의 눈가는 눈물로 젖어있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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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여름 이관우 선수가 떠난 뒤 8번은 결번이 됐습니다. 그때 데닐손 선수가 그 번호를 자신에게 달라고 해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마침 대전시티즌 유소년캠프행사장에서 데닐손 선수를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8번의 의미를 아냐고 묻자 데닐손 선수는 “8번이 갖고 있는 그 특별함을 잘 알고 있다”며 “앞으로 8번을 달고 대전의 승리를 위해 뛰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동안 그를 어떻게 불렀는지 생각해보았습니다. 대전 용병 데닐손. 저는 그를 그렇게 불렀습니다. 물론 저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그를 ‘용병’이라 불렀습니다. 생각해보니 우리는 예로부터 전쟁 시 돈을 주고 데리고 온 병사들을 가르켜 '용병'이라 부르곤 했습니다. ‘외국인 선수’라고 부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용병’ 이라는 표현을 썼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미안했습니다. 그래서 데닐손 선수의 눈물은 더 특별하게 기억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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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닐손 선수의 큰 아들 델손의 눈물도 기억납니다. 델손은 참 밝고 붙임성 있는 아이입니다. 경기가 끝날 때면 늘 “다음 대전 경기 때 또 볼 수 있죠?”라며 웃곤 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경기장에 서 있더군요. “델손, 왜 그래?”하고 물어보니 아이는 눈물을 닦으며 저에게 말했습니다. “우선은요, 대전이 져서 속상해요. 아빠가 내 생일 선물로 골을 넣어주겠다고 했는데 그러지 못해 속상해요. 이번에는 대빡이 세레모니 보여준다고 했거든요. 그리고 노란카드가 3장이 돼서 다음 경기에 못 나오게 됐어요. 그런데 다음 경기도 대전 홈경기잖아요. 대전에서 아빠가 뛰는 경기를 못 보게 돼서 속상해요.” 어느새 대전을 ‘아빠가 뛰는 팀’ 이자 ‘나의 팀’ 으로 생각하는 그 마음이 너무 예뻐 참 오랫동안 델손을 꼭 안아줬습니다. 여담입니다만 결국 델손의 아빠, 데닐손 선수는 바로 다음 경기에서 골을 성공시키며 대빡이 세레모니를 보여줬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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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말이죠, 어제는 제가 울고 말았답니다. 삼성하우젠 컵 2007 개막전이 열린 지난 3월 14일. 안정환 선수는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반지의 제왕이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줬습니다. 그리고 대전은… 0-4로 패하고 말았습니다. 사실 전반 끝날 무렵 수원 에두 선수의 골이 들어가며 0-3으로 됐을 때만 해도 제 마음에는 희망과 믿음만 있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후반 36분 수원에게 네 번 째 골을 허용하고 말았습니다. 고개 숙인 최은성 선수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울컥 눈물이 나더군요.그리고 바로  그 순간, 제대로 된 연습구장이 하나 없지만 마음까지 가난한건 아니라며, 오히려 가족 같은 분위기에서 뛸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하지 아냐고 묻던 선수들 얼굴 하나하나가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그 선수들이 입고 있는 자주빛 유니폼, 그 한 가운데에 새겨진 'It's Daejeon'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 말이던가요. 그렇지만 오늘의 패배가 조금은 오래 그들 가슴에 남아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됐습니다. 내 마음 속에서는 언제나 전사이며 영웅인 당신들이 혹시 이대로 무너진다면 이제 나는 어떡하냐며 스탠드 위에서 그만 눈물을 쏟고 말았습니다. 


네. 물론 압니다. 그 경기 하나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요. 시즌은 막 시작됐을 뿐입니다. 이제 3월입니다. 앞으로 9개월이나 더 남아있는데 말이죠. 잠깐 넘어졌다고 울어서는 안 되는 법이거늘 참 바보같이 울고 말았네요. 경기를 마치고 데닐손 선수에게 인사말을 건네자 빨갛게 변한 제 눈을 보더니 살짝 미소를 지어보이더군요. 그리고 나서 데닐손 선수는 제게 말했습니다. 지난번에도 이야기 하지 않았느냐. 오늘 졌다고 내일 지는 건 아니다. 그런 게 바로 축구다. 우린 다시 일어날 것이고 다시 뛸 거다.


 "That is football, isn't it?"


데닐손 선수의 그 말은 참 많은 위안이 됐습니다. 물론 그날 밤 선수들은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을 테지만요.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님을 그들 역시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울지 말아요. 대전시티즌. 그리고 퍼플아레나를 사랑하는 당신들 모두 말이죠.


베컴도 최근에 광고를 통해 그렇게 말했잖아요. 누구나 언젠가는 시련을 겪지. 중요한 건 그 시련에 꺾이지 않는 거야, 라고요. 내가, 당신들이, 그리고 우리가 그러하기를 믿습니다. 꿈 꿉니다. 그리고 희망합니다. 


지난 밤에도 퍼플아레나는 아름다이 빛났을 것입니다. 우리가 슬퍼하며 뒤척이던 그 밤에도 말이죠. 눈물을 쏟으며 경기장을 나서는 날에도 늘 아늑한 어머니의 품처럼 우리를 안아줍니다. 그 덕분에 빛조차 없는 그런 날에도 그곳은 언제나 따뜻하기만 하지요. 기억에는 없지만 어머니의 자궁도 퍼플아레나처럼 그렇게 따뜻했을 것입니다. 퍼플아레나에 갈 때마다 경이로움을 느끼는 이유도 어쩜 그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숫자로 값이 매겨지는 냉정한 프로의 세계에서 그보다 값진 것들이 있다는 사실을 당신들은 땀으로 내게 알려줬습니다.  그래서 고맙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고마움을 앞으로 무한한 사랑과 지지로 갚아 나가려고 합니다. 눈물은 이제 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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